우리 역사가 왜 왜곡되었나?

1. 사료의 결핍

우리 민족사가 왜곡된 원인 중 하나는 사료(史料)의 결핍인데, 그렇게 부족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외세(外勢)가 소각(전쟁에 의한 방화), 탈취 등의 방법으로 없애버린 것이요 또 하나는 이러한 외적(外敵)의 만행에 탈취 당하지 않기 위하여 숨겨져 오던 문헌자료들이 장구한 세월의 은닉과정에서 자연 부식(腐蝕) 또는 유실(遺失) 마멸(磨滅)되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사료 멸실(滅失)의 외세적인 작용 속에서도 명맥이 잔존하였던 사료들이 있었으나 이 사료들을 종교적 편견과 사대주의에 의해 보잘 것 없는, 일고의 가치조차도 없는 야사류(野史類)로 팽개쳐 묵살하거나 자의적으로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사료의 멸실을 가져온 큰 사건만 추려서 흔히 ‘10대 수난사’라고 한다.

첫째, 고구려 동천왕 20년(246)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침공하 여 많은 사서들을 소각(燒却)하였다.

둘째, 백제 의자왕 20년(660)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소각 되었다.

셋째, 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역사 전적(典籍) 을 모두 탈취하여 갔다.

넷째, 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왕이 경애왕을 치고 경순왕을 세우면서 신라의 사서들을 전주(후백제의 수도 : 완주)로 옮겼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토멸 당할 때 (935) 방화 소각하였다.

다섯째, 고려 인종 4년(1126) 사대주의다 김부식이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는 서표(誓表)를 바 친 후, 주체적인 사서들을 금나라가 거둬서 가지고 갔다.

여섯째, 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의 난으로 홀필렬(忽必烈)에 의하여 삼한고기, 해동고기 등 많은 사서들이 소각 되었다.

일곱째, 조선 태종 11년(1411)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송나라 유교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비유교 서적은 모두 소각하였다.

여덟째,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되었고, 많은 자료 를 일본이 탈취하여 갔다.

아홉째,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으로 아까운 사서(史書)들이 수 없이 잿더미가 되었다.

열째, 순종 4년(1910) 일본 제국주의 강점 이후 한꺼번에 민족사서 20만권을 불사르는 등 많 은 사서를 소각, 수탈, 왜곡 개작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조선 강점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단군역사 2000년을 없애버리고, 한국사를 일본사 2600 년 보다 짧은 2000년으로 줄이고, 역사적 실재인 단군조선을 부정하고 단군신화론을 조작하여 널리 퍼뜨렸다.

이렇게 엄청난 10대 수난사로 우리의 사서(史書)들은 잔존(殘存)할 여지가 없었다. 더욱이 중국적 사대사관(事大史觀)의 격랑(激浪)속에서 민족사서가 그 명맥을 이어오기란 매우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

2. 삼독(三毒)에 의해서 왜곡되었다.

삼독(三毒) - 중독(中毒), 왜독(倭毒), 양독(洋毒)

1) 중독(中毒) - 사대주의(事大主義)사관

사대주의의 시작

A.D. 608년에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걸병표(乞兵表)를 보낸 것을 사대주의의 효시(曉示)로 본다. 실제로는 A.D. 650년 신라가 당(唐)나라 고종(高宗) 영휘(永徽) 원년의 연호(年號)를 갖다 쓰면서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연호를 갖다 쓴다는 것은 속국(屬國)이란 의미다.)

이후 통일신라, 고려, 조선이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사대주의사관이란 중국(中國) 중심의 역사관을 말한다. 우리 역사를 우리 입장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려의 사대주의

왕건(王建)이 자주적으로 채택한 연호 천수(天授)이래 자국의 연호를 내던지고 후당(後唐), 후한(後漢), 후주(後周), 송(宋), 금(金)의 연호를 썼다.

고려 숙종 7년(1102)에 예부상서 정문이 평양에 기자묘(箕子廟)를 만들고 기자(箕子)를 우리민족의 시조신으로 받들어 초하루, 보름 마다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고려 인종 13년(1136)에 묘청, 정지상 등 금국정벌론과 칭제건원을 주장한 국풍(國風) 북벌파(北伐派)를 역적(逆賊) 혹은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몰아 제거하거나 내팽겨 쳤다.

고려 인종(1109~1146, 예종 4~인종 24)은 금 희종의 명을 받아 김부식에게 모든 민족 사서를 거둬들여 소각하게 하고 ‘삼국사(기)’를 펴내게 하였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 고려 문종 29~의종 5)이 사대주의 사관으로 쓴 역사서이다.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金覲)은 당송 8대가 중 소식(소동파), 소철 가문을 존경하여 자기 아들의 이름마저 김부식, 김부철 등으로 지었다. 첫째는 부필(富弼), 둘째는 부일(富佾), 셋째는 부식(富軾), 넷째는 부철(富轍, 富儀)로 부철은 '묘청의 난' 토벌 대장인 형 부식 못지않게 이미 묘청이 서경천도설을 주장할 때 인종에게 북벌불가론을 상소한 사대주의자였다.

부식은 금 희종의 명을 받들어 노예사관인 ‘삼국사(기)’ 편찬 특별 별동부대를 만들어 지나에의 예속사관을 만들되 전국의 민족 도가(道家)사서를 수집 소각하는 민족사에 씻을 수 없는 패역(敗逆)의 짓을 벌였다.

고구려가 수, 당에 굴복치 않고 항전한 것을 두고 불의라 하였고(삼국사기 22 보장왕 하),

백제가 중국에 굴복치 않고 항전한 죄로 멸망한 것을 두고 당연한 일이라 망언했다.

또 신라 법흥왕이 중국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국가의 연호를 쓴 것을 두고 칭찬을 못할지언정 반대로 그릇된 일이라 망언했다.(삼국사기 권5 진덕왕 4년조)

또 ‘옛 문헌들은 거칠고 무디며, 사적(史籍)이 없어져 옛 일이 아득하고 어지럽다.’는 말로 단군조선을 비롯한 우리의 역사 일체를 묵살해 버리고 기자조선을 반도(半島) 내로 끌어들였다.

또 「사기」 <조선열전> 이래 국경선에 가로놓여있는 강하의 이름을 패수(浿水)라 불렀음이 사서상의 일반적 칭호였음에도 불구하고 금제(金帝)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대동강이 패수라 한 당서(唐書)를 근거로 하여 평양이 한대(漢代)의 낙랑군(樂浪郡)이라 했다.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한 최충헌, 묘청, 배중손 등은 역적으로 기입하고, 우리 고유의 ‘균전(均田) 제도’를 당에서 수입한 것이라 날조하고, 화랑사상과 화랑도의 활동을 삭제했다.

조선의 사대주의

이성계는 북벌주의자 최영을 무너뜨리고 친명(親明) 사대주의 조선을 건국한다.

(주원장과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이다.)

태조 때 정도전은 기자조선을 존중하여 국호를 조선으로 한다고 하였다.

세종 때 정인지 등의 집현전 학사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가 폐하(陛下), 짐(朕), 조(詔), 황후, 태자 등의 자주적이고 독자적 왕국에서 사용하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우리는 일개 제후국에 불과하다 하여 전하(殿下), 과인(寡人), 교(敎), 왕후, 세자로 고치게 했다.

정인지 등은 '고려사' 서두에서부터 고려왕실의 조상은 기록이 없어 미상(未詳)이라 해 놓고, 고려 왕건 태조를 당나라 선종의 아들이라 위조하여('作帝建 일화'로 아들 龍建을 거쳐 손자 王建이 나온다.) 당나라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양 혈통까지도 위조하였다.

서거정은 ‘삼국사 절요’ 서문에서 먼저 중국을 내세운 것은 천자(天子)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며 신라가 독립국가의 연호를 사용한 것은 참람한 일이므로 이를 삭제한다고 했다.

퇴계 이황은 ‘大明爲天下宗主國’이라 하여 조선보다 대명제국이 천하의 종주국이라 하여 명 제국을 본조로 여겼다.

율곡 이이는 명의 군주를 황조(皇祖), 황상(皇上)이라 칭하고, 명의 국토를 신주(神州), 서울을 신경(神京) ,경화(京華)라 칭하고, 명 제국을 천조(天朝) 내지 성조(聖朝)라 하였고 명의 황실을 옥황가(玉皇家)라 하여 극존칭으로 일관했다.

태종은 고조선의 역사서인 ‘신지비사’, 고려 때 편찬한 단군조선의 역사를 밝힌 ‘해동비록’을 위시한 일체의 민족사서들이 유교를 중심으로 한 존중화 사대주의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모조리 소각하여 없애버렸다.

세종은 몽고(원)의 압제 이후의 역사만을 다루어 ‘조선사략’,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편찬케 하고 가장 중요한 기초사료인 ‘실기’는 규장각 깊숙이 비장하여 결국은 임진왜란 중에 소실케 하였다.

또 세종은 3대 가륵단군이 창제한 가림토문을 훈민정음으로 뒤바꿔치기하고 단지 제자론, 음운론, 음성론 등을 연구해 그 해제에 해당하는 해례본을 써서 첨가했을 뿐인 것을 창제하였다고 기만하였다.

이후 조선은 공자의 춘추의 의(義)에 근거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의 기치를 내걸고 중국을 존중하는 것을 일대 의리로 생각하여 역사를 왜곡하여 민족정신을 소멸케 하였다.

서거정의 ‘동국통감(東國通鑑)’,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한백겸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한치윤의 ‘해동역사(海東歷史)’,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의 조선시대에 편찬된 역사서는 '중화 사대주의'에 물들어 모두 우리 역사를 왜곡하였다.

2) 왜독 - 식민사관(植民史觀)

식민사관은 일제의 침략주의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고, 일본의 한국 강점의 당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행한 일제의 날조사관으로서 '황국사관(皇國史觀)'이라고도 한다.

일제의 어용학자들은 이른바 일선 동조론, 일본의 임나 경영설 등 허무맹랑한 사실을 날조하여 일제의 국권 강탈을 두고 한반도가 일본 영토로 복구되는 것이라 하였고 한국과 일본의 상태가 고대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먼저 조선 사람들의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들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건인 것이다.’

(1922년 조선 총독이 시행한 교육시책)

2004년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 땅에서 전쟁을 벌인 지 1백년이 되는 해이다. 청일전쟁(1894~1895년)의 결과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청국으로부터 받은 배상금은, 한국 전체의 철도부설권을 획득하고 광산, 삼림, 어업, 항시(港市), 온천 등에서 얻은 갖가지 이권과 함께 한국의 금수출, 상무역(商貿易)까지 장악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 무렵 영국과 일본이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한 후 한국의 영토이었던 만주를 점령하고 러시아에 대해 철수요구를 하는 등 한국의 만주 땅을 둘러싼 국제적인 관계는 더욱 미묘하게 진행되었다.

1896년 조선 고종 재위 34년에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꾸었다. 광무 7년(1903) 4월 러시아군이 마적과 함께 한국의 땅 만주(滿洲) 국경을 넘어서 용암포(龍岩浦)를 강제 점령하자 일본은 즉각 러시아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오히려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을 중심으로 분할 점령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일본측에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 아래서 1904년 1월 23일 한국정부는 엄정 중립국임을 해외에 선포하였다. 2월 6일 39도선 문제와 한국의 만주 영토문제로 대립하던 러시아와 일본이 국교를 단절하고 1904년 2월 8일 여순(旅順)에서 첫 포성이 울렸다.

1904년 2월 10일 새벽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여 러시아 함대를 침몰시키고 서울로 입성하여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상태에 들어갔다.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은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攻守同盟)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가 체결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 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만주>영토를 보전한다고 보증되어 있으나 기타 조항은 모두가 주권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러일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대한제국은 5월 18일자의 조칙(詔勅)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고,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시아 회사에 할애하였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심화시켰다. 1904년 8월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공사 사이에 <외국인용빙협정(外國人傭聘協定)>을 체결함으로서 일제는 한국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 시작되었다. 한편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의 조정으로 러일 양국의 강화회담이 포츠머스에서 열려 전문 15조, 추가 약관(約款) 2개조의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포츠머스회담은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에 따라 독립국가의 주권을 무시하고 결국 한국의 영토를 일본이 점령하는 월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왕은 특명전권대사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파견하여 하야시공사와 주한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앞세우고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내용으로 하는 신협약안(新協約案 - 을사조약(乙巳條約), 혹은 을사보호조약이라 한다)을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전달하었다. 이토히로부미는 하세가와와 함께 고종을 3차례 알현하였다.

11월 16일 정동(貞洞)의 손탁호텔에서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이하 8대신을 위협하여 신협약안의 가결을 강요하였다. 17일의 어전회의(御前會議)에서도 5시간이나 계속 강요하였으나 결론이 내려지지 않자 이토와 하야시는 수십 명의 일본 헌병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들어가 대신 각각에게 위협하며 가결을 강요하였다. 이때 고종은 다만 정부에서 협상 조처하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고 한규설만 무조건 불가하다고 하였다.

한규설에 동조한 사람은 탁지부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閑泳綺)와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 뿐이었고,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비롯하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등은 모든 책임을 고종황제에게 전가하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이들을 <우리나라 만주 땅을 팔아먹었기 때문에 을사오적(乙巳五賦)이라 한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신협약안을 궁내대신 이재극(李載克)을 통해 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한 뒤 동(同)일자로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등을 중요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사이에 조인 체결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통감부는 조선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3권을 장악하여 관헌의 감독권, 병력동원권, 또한 조선의 시정 감독권 등 어떠한 정책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명실공히 조선보호의 최고 감독기관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1910년에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하여 한국의 만주 땅을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키고 대한제국의 영토를 멋대로 조선이라 개칭하였다. 일황 칙령(勅令) 제 319호로 통감부의 이름을 고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고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조선총독에 취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왕의 직속이며, 조선 주둔 일본 육, 해군을 통솔하여 조선의 방위를 맡으며, 모든 정무를 총할하여 내각총리대신을 경유해서 일본왕에게 상주, 재가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을 두고 이를 정무총감이 의장이 되어 관장케 하고, 그 밑에 부의장(親任官대우) 1명, 고문(勅任官대우) 15명, 찬의(贊議:칙임대우) 20명, 부찬의(副贊議) 35명, 겸임의 서기관장 1명, 서기관 2명, 통역관 3명, 속전임(屬專任) 3명으로 구성하였다. 이 가운데 의장을 제외하고 한국인도 임명하고 그 임기는 3년으로 정하였다. 각 도에도 참여관(參與官), 참사(參事)를 두어 지방장관의 자문에 응하도록 하였으나 이들은 친일인사를 우대하는 명예직에 불과하여 실권은 없는 형식적인 것이었다. 또, 한국인은 특별 임용령에 의해서 총독부소속 관서의 문관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구성 비율은 미미하고 일본 관리와는 현격하게 차별되어 모든 관서의 실권은 전부 일본인이 독점하였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한국 국민을 일본화하기 위해 소위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기만적인 동화정책을 폈는데, 그 본질은 유구한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를 말살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하신 인류의 아버지 삼성(三聖 : 환인, 환웅, 단군)의 역사를 단절시키고 역사를 왜곡시켜 민족정기를 단절시키는 과업을 제 1의 국책으로 삼았다. 즉 우리나라는 고대로부터 조선반도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항상 강대국에 조공을 바치는 중국의 속국으로 만들고 일본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명이 정체된 나라로 비하하여 그들의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국책이었다.

제일 먼저 식민지 교육정책을 강요하고 우리 어문(語文)의 사용금지, 일본어 사용 강요, 일본식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이었다. 아울러 역사 왜곡의 증거가 될 만한 문화 유적물을 파괴하여 그 흔적을 없애고 혹은 신라 김유신 장군의 능을 경북 월성군 경주에 존재한 것처럼 조작하는 등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명에 준거하여 역사왜곡을 국책 제 1호로 시행하였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초대조선총독에 취임하자, 1910년 11월부터 전국의 각 도(道), 군(郡)의 경찰을 동원하여 1911년 12월말까지 1년 2개월 동안 전국을 강제 수색하여 '단군조선' 관계 고사서 등 51종 20여만 권의 사서를 수거하여 불태우고 한국의 역사를 왜곡하기 위한 전초작업에 들어갔다. 곧이어 데라우치는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 반도사’ 편찬을 담당시켰다.

'편찬과'는 1925년 6월 일황 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 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단군조선 삼한에 대한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위장 완화했다. 그 뒤 한반도는 물론 일본, 중국 및 만주에 있는 단군조선 등 한국사 관련 사료 4천 9백 50종을 압수하여 불태웠다. 광복 후 출간된 제헌국회사와 문정창씨의 저서인 군국일본조선 강점36년사는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사학자이며 평론가인 하라타사카에루[原田榮]의 저서 ‘역사와 현대(1981년 4월 25일 발행)’를 보면, 1923년 7월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구로이타[黑板] 고문이 대마도에 사료탐방을 하였을 때 한국과 관계가 있는 문서, 고기록 등이 다수 대주구 번주(藩主영주) 종백작가(宗伯爵家)에 있는 것을 알고, 고문서류 6만 6천 469매, 고기록류 3천 576책, 고지도 34매 등을 은폐 또는 분서(焚書)했다고 밝혀져 있다.

일제는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무려 27년 간 고조선 삼한의 고사서를 탈취하여 유구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흔적을 말살하였다. 한국역사를 왜곡하여 ‘조선 반도사’를 편찬하는데 그 증서로 필요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두 서적만 남기고 모두 다 불태웠던 것이다.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병도

일제식민지 시대에 우리나라 역사 왜곡의 주역이었던 이병도(1896~1989)는 노론(老論) 유력 가문인 우봉(牛峰) 이씨이다. 이병도는 매국노 이완용의 조카손자다. 열두 살인 1907년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일인이 경영하는 불교고등학교를 찾아가 일어(日語)를 배웠다. 나라를 빼앗겨 대한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청년 학도들이 목숨을 바쳤으나 이병도의 뇌리에는 애초부터 항일 의지 따위는 없었다.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의 장기적 계략에 포섭되어 일본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와세다대학 사학과를 1919년에 졸업했다. 이때 일인 학자 요시다[吉田東伍]가 이미 한국의 역사를 변조하여 저술한 ‘일한고사단(日韓古史斷)’을 독파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왜곡의 주역 일인(日人) 학자인 동경제국대학의 이케노우치[池內宏]와 와세다대학의 강사 츠다[津田左右吉]로부터 문헌고증학, 즉 실증사학의 기초를 다지며 한국역사 왜곡에 대한 개인적인 세뇌 지도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귀국한 이병도는 이완용과 이케노우치의 추천을 받아 1925년에 설치된 ‘조선 반도사’ 편수회의 핵심위원으로 들어갔다. 이병도는 촉탁이기 때문에 무보수로 일했다고 변명하면서 이 시절 규장각 도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학문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합리화하곤 했다. 이 시절 그는 조선사편수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등에 한사군(漢四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설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고려시대 풍수도참(風水圖讖) 사상, 조선시대 유학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때 쓴 그의 논문들은 단재 신채호의 민족주의사학과는 서로 배치되는 논리들이었다.

1920년대 연희전문, 보성전문, 이화여전 등이 민립대학 건설 운동을 일으키자 일본은 경성제대의 문을 열어 이 운동을 좌절시켰는데, 경성제대는 이런 불순한 목적의 대학답게 식민사학을 맹렬히 전파하여 ‘조선 반도사’를 합리화 시켰다. 이외에도 호소이[細井肇]를 비롯해 아오야나기[靑柳南冥] 같은 일본 국수주의 국학자들도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식민사학을 쏟아내며 조선국은 고대로부터 반도국가로서 미개한 민족이라고 역설하고 있었다.

일황의 칙령에 의하여 ‘조선 반도사’ 편찬에 착수한 일제는,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반도국가였다고 왜곡한 것을 합리화하고 세뇌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어용 학술단체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1922년의 조선사편찬위원회와 1925년의 조선사편수회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의 고문에는 일인들과 한국인들이 함께 포함되었는데, 일본 측은 경성대 교수인 로이타[黑板勝美], 미우라[三浦周行] 같은 학자들인 반면 한국 측은 역사학자가 아니고 친일 정객 이완용, 박영효, 이윤용, 권중현 같은 역적들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죽을 때까지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었다.

당시 초대 조선총독은 취조국이 관장하던 업무를 1915년 중추원으로 이관하고, ‘조선 반도사’ 편찬과를 설치하고 우리민족의 대 역적인 이완용과 권중현 등 역적들을 고문으로 앉히고, 1916년 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은 참의와 부참의 15명에게 ‘조선 반도사’ 편집 업무를 맡기고, 일본 동경제국대학 구로이다 가쓰미[黑板勝美] 박사와 일본 경도제국대학 미우라[三浦周行] 교수, 경도제대 이마니시류[今西龍] 등 3인에게 지도, 감독을 의뢰하였다.

1922년 12월 일황 훈령(訓令) 제64호를 공포하여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한 15명의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이완용, 권중현 등 역적들과 일본인 어용학자들이 합작하여 한국인 학자들의 외면으로 ‘조선 반도사’ 편찬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조선총독부 총독 사이토는 <‘조선 반도사’ 편찬위원회>를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일황(日皇)의 칙령으로 설치근거의 격을 높이고 확대 개편하였다. 1925년 6월에는 일황 칙령 제 218호로 <조선사편수회 관제>를 제정 공포하고 조선총독부 총독이 직접 관할하는 독립관청으로 승격시켰다.

독립관청으로 승격된 총독부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는 ‘조선 반도사’ 편수회는 막대한 인적, 물적 역량을 동원해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군(樂浪郡), 임둔군(臨屯郡), 현도군(玄菟郡), 진번군(眞番郡))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대부터 한국은 중국의 속국이라는 이론을 수없이 쏟아내 조선의 식민지화를 정당화시켰다.

1926년 문을 연 경성제국대학도 식민사학을 전파한 또 다른 기관을 만들었다. 1930년 5월 경성제대 교수와 조선사편수회원, 그리고 조선총독부 관리들이 총동원되어 청구학회(靑丘學會)라는 어용 학술단체를 조직하는데 이들 역시 조선총독부의 막대한 지원을 받았다. 일제의 한반도 및 대륙침략 의도에 발맞춰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어용 단체는 저술, 출판, 강연 등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의 회무감독은 경성제대 교수인 일인 쇼우다[小田省吾]였고, 서기는 조선사편수회 서기인 마에다[前田耕造]였는데, 이병도는 신석호와 함께 이 단체의 핵심위원이었다. 또한 이병도는 이나바[稻葉岩吉], 쇼우다 등의 일본인 및 손진태, 홍희, 유홍렬 등 한국인들과 함께 이 어용 학술단체의 기관지인 청구학총(靑丘學叢)의 주요 필자이며 또 다른 식민사학의 학술지인 조선사학의 주요필자 이었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33년 불교전문학교 강사 시절이었다.

일본인 학자들과 함께한 청구학총이 어용단체로 밝혀지자 이를 두려워한 일제와 이병도는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1934년 5월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설립하였다. 즉 일인을 배제하고 순수 민간 학술단체로 위장하여 국내 및 주변 지역에 대한 역사, 언어, 문학 등 인문학에 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국 학자의 힘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를 국어로 발표하려는 의도 하에 창립되었다. 초대 편집 겸 발행인 이병도(李丙燾)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출강하면서 기관지인 진단학보(震檀學報)를 발행하고 일제강점기 1941년 6월 제14호로 종간하고 해산되었다. 그 후 1945년 8.15광복 후 다시 진단학회가 발족된다.

일제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유포시킨 식민사학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 인데, 그 하나는 사대성이론이며 다른 하나는 정체성이론이다. 한국 역사는 고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의 역사이자, 고대 이래로 발전하지 못한 정체된 사회라는 것이 두 이론의 논리였다. 따라서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의 퇴보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이 이들의 식민지 지배논리였다. ‘조선 반도사’ 편찬 실무자 스에마쓰[末松保和] 등 20여명의 일인 학자들과 한민족의 반역자 이완용의 후손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홍희(洪憙) 같은 한인학자들이 참여하여 드디어 24,409쪽에 달하는 반도 조선사 34권이 완간 했던 것이다.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는 1922년 12월 일황의 칙령에 따라 '조선사편찬위원회' 설치 때부터 1938년 3월까지 만 16년 동안 24,409쪽에 달하는 ‘조선 반도사’ 34권을 완간하였다. 일본의 계략대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이병도는 일본의 제 1등 공신으로 인정받아 일본천왕으로부터 거액의 포상금과 금시계를 받았다.

1945년의 8.15 해방을 맞아 진단학회의 자진해산 후에도 조선사편수회에는 꾸준히 나가던 이병도는 해방 후 경성대학과 그 뒤를 이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고 곧이어 서울대학 대학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때 김상기, 이상백, 이인영, 유홍렬, 손진태 등 사학자들과 조윤제, 이숭녕 등 국문학자들이 서울대 교수로 취임해 진단학회는 친일 학자들이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이병도의 해방은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해방 다음날 경제사학 계열의 백남운을 중심으로 조선학술원이 결성되고, 같은 날 진단학회도 재건되었으나 진단학회가 곧 “친일파 제명운동”에 들어간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었던 조윤제가 주도한 이 운동의 제명 범주에 이병도가 들어간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이병도는 재건된 진단학회를 주도할 수 없었고 송석하와 조윤제가 위원장과 총무를 맡고, 송석하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이상백이 그 뒤를 이었다. 이병도의 일제시대 행보는 떳떳할 수 없는 경력이었다. 그러나 친일파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남한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1950년 6.25전쟁이었다. 6.25전쟁은 많은 민족주의 인사들이 납북됨으로써 남한 학계를 가짜 실증사학의 이병도 독무대로 만들었던 것이다.

남북휴전 다음해인 1954년에 이병도가 진단학회의 이사장으로 취임 할 수 있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이병도는 친일파 청산 제 1호에서 벗어나 국사학계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이병도는 식민사학을 유포하던 경성제대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장과 학술원 부원장을 맡아 역사학계의 최고 원로로 부상했다.

이병도는 1960년 문교부장관에 등용되고 같은 해 학술원 회장에 선임되었다.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965년 동구학원(東丘學園) 이사장, 1966년 성균관대학교 교수 겸 대동문화연구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69년 국토통일원 고문에 추대되었다. 1976년 동도학원(東都學院) 이사장에 선임되었고 1980년 85세의 고령으로 국정자문위원(國政諮問委員)에 위촉되었다. 그 동안 문화훈장 대한민국장, 학술원 공로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5.16민족상 등을 수상하였다. 1986년 10월 9일(목)자 조선일보에 단군은 신화가 아니고 우리나라 국조이며 ‘역대왕조의 단군제사는 일제 때 끊겼다’ 라는 제목으로 특별기고 하여 우리나라 고대역사 왜곡의 사실을 발표하고 1989년에 죽었다. 또한 이병도의 저서에 ‘한국사대관’, ‘한국사(고대편, 중세편)’, ‘고려시대 연구’ 등이 있다.

‘조선 반도사’는 우리나라 환국시대 3,301년-배달국시대 1,565년-조선국 삼한시대(진한, 마한, 변한) 2,096년과 동북부여시대 204년 도합 7,166년의 역사를 말살하고 삼한과 삼국은 고대부터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위치한 부족국가로서 중국에서 설치한 한사군(漢四郡 : 낙랑, 임둔, 현도, 진번)이 한반도 내에 있었던 것으로 변조하여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국의 속국이라고 왜곡하여 편찬한 책이다.

이병도가 주역이 되어 편찬된 조선사, 조선사료총간, 조선사료전집을 증서로 하여 우리 국사가 편찬되었다. 그래서 넋을 빼앗긴 한민족은 오히려 이병도를 민족사학의 선구자로 맹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 반도사’의 망령이 세계 인류의 문명을 주도하고 세계 인류를 구제하여 인류역사상 평화시대를 이루었던 단군조선과 부여의 역사를 암흑 속으로 묻어버렸다.

한민족의 반역자 이병도의 범행에 더욱 통탄 할 일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과 가락국은 중국 대륙에서 개국한 사실이 삼국사기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중국의 지명을 한반도의 지명과 억지로 짜 맞추고 자기 임의대로 주석(註釋)하여 마치 4국이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처럼 국토를 축소하여 그야말로 이름과 같이 반도 조선사를 편찬했던 것이다.

그리고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개국한 고려시대 역시 중국 대륙에 있었으나 민족의 반역자 이병도로 인하여 한반도 내로 쪼그라들었다.

세계 인류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남의 나라를 강탈한 해적이 남의 나라 역사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의 명을 받고 정명가도를 외치며 침략한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1562~1611.8.2] 앞에 길안내를 하겠다고 이 아무개라는 조선인이 나섰는데 이 사람의 16대손이 바로 이완용이다. (한 일인 사학자가 족보를 밝혀놓은 것)

현 역사박물관장 이건무, 현 서울대학교 총장 이장무는 이병도의 손자들이다.

[식민사학 계보]

현 사학계의 주도권을 쥔 자들은 모두 식민사학의 1세대인 이병도의 제자들로서 (물론 고려대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쳤던 신석호도 있지만 일찍 타계하였음.)

제 2세대를 꼽으면 서울대학교파로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한림대 한국사 교수),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용 등이 있고 비서울대파로 김정배, 유원동, 변태섭 등이 있다.

제 3세대로는 혜성같이 나타나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동국대학교 교수 이기동이 있다. (이 자들은 민족사학자라는 명칭을 슬그머니 사용하기 시작했다.)

1976년 발표한 ‘한국고대사 연구’라는 책에서 만리장성이 우리나라 황해도 수안에서 시작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는 몇 해 전에 타계하였다. 죽기 전에 친구 최태영 박사의 설득으로 아주 조금이지만 뉘우치고 세상을 떠났다.(‘한국상고사 입문’을 최태영 박사와 공저로 내 놓으며 단군조선을 실존 역사라고 인정하였다.)

다음으로 유명한 자는 이기백 이다.

이기백은 한국사 신론 서문을 ‘한국사는 아시아 대륙의 한 끝에 붙어있는 조그마한 반도의 역사다.’라고 시작하면서 그의 학문적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한사군을 한반도 안에 끌어다 서술한 ‘한국사 신론’ 같은 이 자의 책이 영어로 번역되어 외국인에게까지 한국사를 그릇되게 인식하게끔 만들고 있다.

이기백은 87년 6월 8일자 동아일보의 “국사 교과서 개편 방향을 보고"라는 제하의 글에서,

‘.....물론 필자의 개인의 의견을 말한다면 불만스러운 점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예컨대 고조선을 문화권이 아닌 국가로 보는 경우에, 초기에는 요령 지역이 그 중심지였다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제왕운기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하기는 하나, 필자가 우둔한 탓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그러한 대목을 발견할 수 없으니 답답할 일이다.....’ 라며 고조선의 영역이 대동강 유역이었다는 주장을 펼친다.

김원용은 일본이 날조해낸 황국사관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다까마쓰 고분 발굴 장소에 가서

일본, 북한, 중국학자들이 모두 고구려인 작품이라고 인정하는 마당에 당나라 화풍이 보인다느니, 고분의 주인공이 고구려로 망명한 중국인이라느니 하고 우겼던 자이다. 또 김원용은 을지문덕이 중국 사람이라고 우기기도 하였다.

비록 식민 사학자들에게서 배웠지만 일부 뼈대 있는 소장 학자들이 그 천편일률적인 식민사학에 싫증을 느끼고 이에 반기를 들려고 하면 그들은 대스승인 이병도 박사가 그런 짓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밥줄이 끓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되니까 어쩔 수 없이 식민 사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자들 중에는 기골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고 자기의 독특한 민족 사관을 학교에서 가르치다 보면 식민 사학자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 화살을 퍼붓는 통에 한국 땅에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어서 미국으로 도피하는 실례도 있었다. ‘국사통론’을 쓴 건국대학교의 박형표 교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화를 들어보자, 1979년 충북 중원(中原)의 입석리(立石里)에서 고구려 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발견됐다. 그것이 국경을 개척하면서 세운 비석(척경비·拓境碑)인지 아니면 단순히 국왕이 수렵이나 순행을 나왔다가 세운 비석(순수비·巡狩碑)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고구려의 비석이 여기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의 영향력이 여기까지 남진했다는 뜻이므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이 비석이 장수왕(長壽王·재위 413∼491년)에 의해 세워진 것만은 틀림없지만 풍상으로 마모된 글자의 판독 과정에서 많은 견해들이 속출했다. 사학계에서는 관련 교수들의 학술회의를 마련했다. 문제의 핵심은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느냐 하는 것. 물론 이를 풀어줄 단서가 될 만한 글자가 보이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는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했던 당시 사학계의 거두인 이병도(李丙燾)는 비석을 분석한 후 이 비석이 건흥(建興) 4년(475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젊은 학자들이 그 논거를 묻자 두계는 “내가 하도 오매불망(寤寐不忘)했더니 꿈에 그렇게 나타났다.”고 대답했고, 자리를 함께 했던 후학들은 “이 학문적 집념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오고간 객담이 아니고 학회에서 발표되어 학술지에 게재된 사실이다.(李昊榮, ‘中原 高句麗碑 題額의 新讀’, ‘史學志’(13), 136∼138쪽, 1979)

당시 83세의 노령이었던 이병도가 한때 총명을 잃고 그런 실수를 했더라도 그 자리에 있던 젊은 학자들, 신학문을 배웠고,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그들이 이를 말릴 수도 없었던, 그래서 그것이 학술지에 게재될 수밖에 없었던 이 웃지 못 할 사건이 버젓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 사학계의 풍토이다.)

3) 양독(洋毒) - 실증주의(實證主義) 사관

오직 유물이 나와야 역사로 인정할 수 있다는 사관이다. 파편조각 하나라도 나와야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주 역사무대는 중국대륙이다. 그런데 사대주의 사관, 식민사관 등으로 인해 왜곡된 역사는 한반도로 활동무대를 축소하였으므로 중국대륙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우리와는 관련이 없고 오직 한반도 내에서 나오는 유물만이 우리와 상관관계를 갖는다는 전제하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니 역사가 바르게 정립될 수 없다. 일제의 식민사관과 현대의 유물사관, 민중민주사관 등이 실증주의의 대표적 예이다.

생시몽이 처음 실증주의라는 말을 사용한 이후 꽁트에 의해 철학적 언어로 이입되어 랑케가 현재주의 역사관에 대치하는 개념으로 정립했다.

랑케는 1830년에 실증주의 사학의 강령을 완성시켰는데 실증주의라는 철학적 개념과는 달리 모든 사건을 전체적 역사 구조와 완전 분리된 독립변수로 봄으로써 자신의 실증사관을 뉴우튼의 기계론적 우주질서관에 접근시켰다.

따라서 실증사관은 분리주의적 객관분석이라는 합리적, 과학적 사료연구방법에도 불구하고 포착된 사실확인에 대한 주관적 이론전개라는 입장에서 본연의 목적에 상치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실증사관은 모든 사건을 독립변수로 봄에 의해 뉴우튼식 우주관에 근거하는 분절적, 분리주의의 분석사관을 도출해 마침내는 시간의 계기에 의한 유기체적 통시사관(도가사관)의 안목을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나무는 보되 숲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애당초 랑케의 실증사학을 매개로 하여 민족사를 왜곡시키고 말살시킨 일제의 황국사관도 객관적 실증사학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진 않았다.

하꾸조 고끼지의 제자 쯔다도 ‘일본역사강좌’제 8권 249쪽에서 '사학은 과학이 아니다.'라고 못 박아 실증주의가 주관주의로써 현재주의적(과거역사는 현실의 투영) 응용사관임을 분명히 했다. 이는 식민지 사관으로 실증주의를 활용하겠다는 학술적 수사(修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로부터 실증사학의 학맥을 전수 받은 이병도 휘하의 국내 실증 사학자들은 일제에 의해 수탈된 등기부 등본이 아니면 정사로 인정할 수 없으므로 세간에 유포된 여러 종류의 고 임대차 계약서는 믿을 수 없다고 구제불능의 궤변을 반복해 왔다.

홍승기의 ‘실증사학론’이 인정하고 있듯이 해방 이후(6. 25 이후) 한국사학계에 주도적이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실증사학은 막상 수많은 외침과 수탈, 인멸로 만신창이가 된 한민족사에게 문헌고증과 사료비판의 칼날을 들이댈 줄 알았지, 정작 한민족사 수탈의 뿌리인 중독, 일독의 장본인인 화하(華夏)족이나 왜(倭)의 사료에 그 수탈사학의 칼날을 들이댈 줄은 몰랐다.

또한 사료비판과 문헌고증에만 매달리다 보니 통사에 어두워 자기부정의 모순에 빠지는 우(愚)를 범해 왔다. 사료비판과 문헌고증의 실증사학이 제국주의 일본이 초록은 동색인 약탈적 독일 랑케 식민사학으로부터 도입한 것임에야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범죄수사학에 있어 과학적 감식은 사건을 결정적으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범인이 남의 모발이나 체모, 단추 등을 현장에 떨어뜨려 수사의 판단을 흐리게 할 경우 현장에 떨어진 남의 증거물을 감식해 무죄한 자를 죄인으로 만든다면 그 감식은 필경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모순적인 사례는 범죄세계에서 수없이 보아온 바이며 우리 역사에서도 ‘삼국유사’ <탈해왕조>에서 탈해가 숯돌과 숯을 미리 파묻고 호공(瓠公)의 집을 탈취했을 때 보는 것처럼 벌어질 수 있다. 특히 우리 역사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외침의 역사와 정신적 사대독(事大毒), 수탈로 점철된 역사임에야 말할 나위가 없다.

게다가 일제 황국사관의 착실한 계승자로 해방 후 강단을 점거해 그 예리한 칼날로 민족의 심장을 도려내고 후벼 판다면 이는 미필적 고의를 넘어서서 진리를 자칭한 가짜 도(道)로써 차도살인(借道殺人)하고 민족을 차도살해(借道殺害)함에 다름 아니다.

홍승기의 ‘실증사학론’이 보여주고 있듯이, 실증사학자들도 사학의 목적과 방법 중에서 사실이 목적이고 실증은 단지 방법에 불과한 것을 잘 알고 있다. 또 그 어느 과학적 사관도 객관적일 수 없고 오히려 애당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이는 실증사학자들이 그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므로 미필적 고의를 넘어선 민족 살해의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한국의 실증사학의 경향은 "사실" 보다 "연구방법" 즉, 실증사학대신 고증사학이라 해도 좋다는 이기백의 정의처럼 문헌고증과 사료비판에만 치중하여 막상 대륙사의 특징을 갖는 한민족 통사와 도가사관에 어두운 눈 뜬 봉사-청맹과니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해방 이후 일제 식민사관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는 강단사학의 불치의 한계가 되고 말았으며 필경에는 오히려 민족사 회복에 사사 건건 물고 늘어지는 반골 기질의 범죄 집단으로 화하고 말았다.

3. 철학적인 이유

지금까지 인류는 천지(天地) 변화의 과정 상 역도수(逆度數)의 과정을 살아 왔다.

역도수의 과정이란 근본(씨앗)에서 멀어져 가는 분열·발달의 과정이다.

이 역도수 과정에서는, 씨앗이 발아하여 줄기를 내고 성장할 때에는 씨앗의 모습은 사라져 잊혀지는 것과 같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모든 것이 다 왜곡되고 근원(근본)은 잊혀져 부정되는 일이 일어난다. 초기의 순수함이 가면 갈수록 희박해져 급기야는 왜곡되는 것과 같다.

우리민족은 인류 역사와 문화의 시원민족으로서 역사와 문화를 완성시켜야 하는 천명(天命)을 부여 받았다. 간난신고(艱難辛苦)를 겪으며 완성을 향해 전진해야하는 역사적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천도(天道)의 섭리로 간도수(艮度數)라 한다.

간도수(艮度數)의 원리

감坎(생명의 근원, 씨앗-바이칼호) → 진震(줄기-중국대륙 중심부·요동반도) → 간艮(열매-한반도 남부)